우리가 살아감에 있어서 “화를 내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인생 훈(人生訓)은 너무나 많거니와 살다 보면 그 말이 지극히 당연한 충고로 받아지곤 한다. 화가 났을 때 자신에게 주어지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크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분노를 표출하고 화를 내며 생활한다. 마치 불나방이 모닥불을 향해 뛰어들어 자신의 몸을 그냥 불사르듯이.
그러나 개인적인 문제이었을 때는 좀 더 화를 내지 않고 신중하게 풀어가는 것이 좋겠지만 우리 이웃의 문제요, 민족의 문제로 번진다면 제대로 된 분노는 내야 하는 것이 오히려 자신의 스트레스를 푸는 길이라 여겨진다. 공분 말이다.
2024년 대한민국 사회는 집단분노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되어가는 듯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국민의 어려운 마음을 감당해 주고 해결해 주어야 할 최고 지도자가 여차하면 격노한다는 소식을 접한 국민이 자신들도 리더의 마음과 동일시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같이 분노하는 시늉을 하는 걸까.
아니면 너무 어처구니없는 리더의 마음에 어안이 벙벙해 분노하는 걸까. 그 판결을 기다리기에는 사법부의 허무맹랑한 저울추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기에 더는 기대하지 않음이 자신의 기대 수명에 도움이 되리라.
융점이란 고체가 액체로 바뀌는 온도를 말하는바 철은 약 1,500°C 이상에서 녹기 시작하고, 물은 0°C에서 녹는다고 한다. 또 한 장례를 치를 때 화장을 하는 화장기는 약 1,000°C 정도의 화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융점이란 이처럼 물질마다 형태마다 각자 천 양지 차이가 있다.
어떤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정말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다. 한 문제를 놓고도 각자의 관점에서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세상 이치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 타당함과 시대적 소명의식이 부족한 관점은 위태롭거니와 공허하기 그지없다.
그러기에 공감되지 않은 말을 함부로 표출하는 것은 극히 삼가야 할 일이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요즘 아침에 일어나면 들려오는 해괴한 소식과 희한한 논리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간직해 왔던 가치관이 갑자기 멈추어지는 듯한 멍한 느낌을 받는다.
“우리 선조들의 국적은 일본이다”는 주장이 우렁차게 들리는가 하면 “동성애가 공산혁명의 시발이다”거나 “진화론은 과학적인 근거가 없으니 창조론을 교육해야 한다.”는 극히 개인적이고 편파적인 신념들이 거침없이 쏟아지며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어디 그것뿐이랴. 용산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각종 비리와 경악스러운 국정 운영은 그렇지 않아도 무더운 올여름 열대야보다 더한 국민적 분노를 자아내게 만드는 데 부족함이 없다. 이런 분노를 만들어 가는 이들이야말로 반 민족적이고 반국가적인 사람이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어떤 일을 해가는 과정에서 자기에게 이익이 나지 않으면 의미 없다고 생각하며 어떠한 가치관도 바꾸어가기를 주저하지 않은 뉴라이트의 집단. 그래서 독립운동을 했던 우리 선조들의 위대한 행위를 자신의 이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은 무모한 행동이라고 규정하는 몰상식은 대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이러한 잘못된 신념이 있기에 일본은 감히 안중근 님을 테러리스트라고 헐뜯고 있지 않은가. 역사학자들도 인정하지 않고 있는 뉴라이트만의 역사 인식은 이번 기회에 완전히 종식돼야 한다.
지금 국민 분노 대상은 가까운 데 있지 않다. 가까운 가족이나 직장이라면 쉬이 이야기라도 하면서 풀 수 있으련만 최고 수장에게 있음이니 더욱 문제인 것이다. 분노는 자신의 건강을 위해 더욱 절제해야 할 명제이지만 종심(從心)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끓어오르는 분노의 감정을 감당할 길이 없으니 어찌하랴.
사실 ‘분노할 줄 모르는 인간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있다. 분노할 때 분노하고 기쁠 때 즐거워하는 사람의 마음 상태가 가장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마음의 표현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생활하기에 최적 온도가 18~20°C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분노 융점도 대략 위와 같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자기의 욕구가 해소되고 스트레스가 풀리는 온도가 인간이 생활하기에 가장 적합한 모양이다. 인사청문회에 나와서 거짓과 비리와 황당한 주장을 너무나도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이들을 보면서 강력하게 처단하지 못하고 넘어가야 하는 무력감.
그것도 대한민국 권위의 최고 상징인 국회에서 대한민국의 근원을 과감하게 부정하는 무지의 역사 인식을 드러내는 그들의 목소리. 그래서 그들이 결국 우리 사회의 주류가 되어가고 있음에 분노가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
분노는 때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사그라지거나 후회할 때도 있지만 분노하지 않은 인간은 매력 0점일 수 있다. 더군다나 자신의 문제가 아니고 공분의 입장에서 침묵하거나 상대를 두둔함은 더욱 그러하다. 인간의 분노 융점은 18~20°C라는데 한 표를 던진다. 사후의 인간은 1,000°C 정도의 화력이 필요하지만 살아있는 인간에게는 그보다 훨씬 낮은 온도가 적용되는 것을 보면 죽음의 길은 삶의 길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세계이려나.
지금 대한민국의 돌아가는 형편에서 국민 집단분노의 융점은 어디 만큼에나 있을까? ‘탄핵’아니면‘5년 임기 채움’ 그것도 아니면 ‘끌어 내림’아! 암울한 2024년 대한민국의 앞날이여. 그래서 올여름은 여느 해보다 더 무더웠나 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분노에 머물러 살아갈 수는 없는 일. 분노의 녹는점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그래야 자신이 건강해질 수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