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 왕조를 여는데 절대적인 공헌을 한 사람, 바로 삼봉(三峰) 정도전이다.
고려 말 조선 초기의 유학자인 정도전은 경북 영주 출신으로서 개경(개성)에 올라와 목은(牧隱)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 이숭인 등과 함께 유학을 배웠다.
과거에 합격해 정5품 관직에까지 승진해간 그는 친원(親元)정책에 반대하다가 전라도 나주로 귀양살이를 떠난다. 초라한 집에 살면서 밭갈이까지 해야 했던 정도전은 1383년, 이성계를 찾아가 인연을 맺음으로써 정3품 벼슬인 성균관대사성이 됐다.
이듬해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자,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세우는데 앞장섬으로써 밀직부사(종2품 벼슬)가 됐다. 다음에는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즉위시킨 공으로 높은 벼슬과 함께 30만평 이상의 밭과 노비 10명을 하사받았다.
명나라에 가서는 ‘이성계가 명을 치려 한다’는 모함을 해명하고 돌아와 도평의사사(고려의 최고 정무 결정기구) 겸 성균관대사성이 됐다. 1391년 우군총제사(군사령관)으로 이성계, 조준(좌군총제사)과 함께 병권을 장악했다. 이어 반대세력인 이색과 우현보 등에 대한 처형을 상소했던 바, 입신출세를 위해 스승 이색 마저 배반한 것이다.
정도전은 그해 9월 평양시장에 임명됐으나 반대 세력들의 탄핵으로 경상도 봉화로 유배당했고 이어 나주로 옮겨졌으며 두 아들은 서인(庶人)이 됐다. 이듬해인 1392년 봄, 귀양에서 풀려난 정도전은 고향인 경북 영주로 돌아온다. 같은 해 4월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살해되고 반대세력이 제거되자 조준, 남은 등과 더불어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다.
조선왕조 개국 후 새로운 국정방향을 제시한 정도전은 개국공신 1등이 됐고 같은 해 10월 명나라에 가서 조선건국의 당위성을 알렸으며, 이듬해 3월에는 경상, 전라, 양광 삼도도총제사(군의 최고직책)가 됐다. 1394년 8월부터 한양 천도를 추진했으며 현재 서울의 궁궐과 문의 이름을 짓고 수도의 행정 분할도 거의 혼자 결정했다.
이념적으로는 불교 및 도교를 비판하고, 유교의 실천 덕목을 채택했다. 1398년에는 요동정벌을 추진하고 이방원을 전라도로, 이방번을 함경도로 보내려 했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제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는데,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이 난은 조선개국에 가장 공이 컸던 정도전 일파와 그들 못지않은 공을 세운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 방원 일파 사이의 권력다툼에서 비롯됐다.
본래 이성계에게는 여덟 명의 왕자가 있었는데 그의 즉위 후 세자책봉 문제가 일어나자, 이성계는 계비 강씨의 뜻에 따라 제8왕자인 방석을 세자로 삼았다. 이 조치에 대해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이 적극 지지하자 이방원은 크게 분개했다. 방원은 자신의 생모인 한씨의 소생 모두가 세자책봉에서 무시당했다는 점, 그리고 창업공신으로서의 자신의 공로를 인정해주지 않은 데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이에 방원은 지략이 뛰어난 하륜을 영입하고 무관장수 이숙번을 받아들이는 등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와 대척점에 서있던 정도전 역시 세자 방석의 교육까지 책임진 마당에 당당한 세력을 갖고 있었으며, 남은, 심효생 역시 막강한 권력을 틀어쥐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방원은 기회를 잡는다.
그 기회란 정도전 등이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다고 속이고,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인 뒤 단칼에 그들을 죽이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것이었다. 이에 방원은 자신의 사병(私兵)들을 동원해 정도전 일파를 기습해 모두 죽이고, 세자 방석을 폐출해 귀양을 보내는 도중에 죽여 버린다.
그리고 이어서 방석과 한 어머니를 둔 방번마저 살해하고 만다. 정도전에게는 ‘종친을 모해했다’는 죄명이 씌워졌으며, 그의 두 아들 정영과 정유는 아버지를 구하러 달려가다가 살해됐다. 얼마 뒤 조카 정담은 큰아버지와 사촌들의 죽음 소식을 듣고 집에서 자살했다. 오직 맏아들 정진만이 당시 태조를 수행하던 중이라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했다.
‘1차 왕자의 난’이 마무리되자, 이방원은 짐짓 세자의 자리를 제2왕자인 방과(이방원의 친형)에게 양보한다. 이에 이성계가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니, 이 이가 정종이다. 그 후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다. 이방원이 실권을 장악하긴 했으되 아직 ‘라이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넷째 아들 방간이었다. 이 무렵 방간을 충동질한 사람이 지중추부사(정2품 관직) 박포였다.
‘방원이 장차 방간을 죽이려 한다’고 거짓말을 꾸며낸 것이다. 이 말을 믿고 방간은 사병을 동원했다. 이를 눈치 챈 방원 역시 사병을 동원해 개성 시내에서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는데, 결국 이 싸움에서 방원이 승리해 방간은 유배되고 박포는 사형을 당했다. 이후 1400년 2월 방원은 세자로 책봉되고, 11월에는 왕위에 올라 제3대 태종이 된다.
한편, 자식들의 골육상쟁을 지켜본 이성계는 함경남도 함흥으로 떠나버린다. 이에 정통성에 흠집이 생긴 태종은 문안 사신을 자주 보내지만 이성계는 번번이 화살을 쏘아 이 사신들을 모조리 죽이고 만다. 여기에서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고려의 충신’ 정몽주는 기울어가는 종묘사직을 끝까지 붙들다가 선죽교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반면에 그의 죽마고우였던 정도전은 이성계의 조선 창업을 도와 개국공신에 올라 화려한 시대를 열어갔다. 하지만 그 또한 격렬한 정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으니 이 두 사람 가운데 과연 누구를 더 높게 평가할 것인가는 그 시대적 상황과 평가자의 가치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리라.
그동안 정도전은 두 왕조를 섬긴 변절자로, 또는 처세에 능한 모사가로 인식됐다. 그러나 정도전을 위한 변호 역시 얼마든지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첫째, 이방원은 정도전에게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죽이려 했다는 누명을 씌워 살해했다. 그러나 이방석의 세자 책봉은 정도전이 아니라 태조 이성계가 한 일이고 정도전이 왕자들을 암살하려 한 계략의 실체는 사실무근이었다.
둘째, '조선왕조실록'에는 정도전이 마지막에 이르러 목숨을 구걸했다고 돼 있다. 그러나 이방원이 역사적인 승자에 입장에서 그를 비열한 인물로 폄하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1차 왕자의 난’ 때 기적적으로 목숨을 부지한 정도전의 장남 정진은 이후 복직돼 나주목사로 기용됐고 세종 때에는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1865년 고종은 경복궁을 중건하고 그 설계자인 정도전의 공을 인정해 그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 그 뒤 고종은 정도전의 사당을 건립했으며 그 사당은 1986년 4월 경기도 유형문화재 132호로 지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