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이사(李斯)가 있다면, 조선에는 한명회(韓明澮)가 있다. 한명회(1415년~1487년)는 조선의 개국공신 한상질의 손자이며, 사헌부감찰(정6품 관직) 한기의 아들로서, 문신이자 군인이며, 정치인이었다. 그는 수태된 지 7개월 만에 태어났다 해서 ‘칠삭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읜 한명회는 불행한 가정환경과 가난, 작은 체구로 말미암아 주변의 멸시와 놀림을 받으며 불우한 소년기를 보냈다. 다만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고 민첩해 ‘집안의 천리마’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한명회는 친구 권람의 소개로 신숙주(변절자라는 뜻의 ‘숙주나물’이란 말을 생겨나게 만든 장본인)를 알게 되고, 그로부터 수양대군을 소개받았다. 과거시험으로는 도저히 관직에 나아갈 수 없다고 스스로를 판단한 한명회는 수양대군에게 무사 30여 명을 천거했고, 이들의 인맥을 통해 거사를 일으킬 병력을 모으게 된다.
한명회가 작성한 살생부(殺生簿)가 조정 대신들의 삶과 죽음을 갈라놓기도 했던 바, 그는 수양대군이 황보 인, 김종서 등의 충신을 죽이고 조카 단종을 쫓아내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계유정난의 1등 공신이 된 한명회는 수양대군이 왕(세조)으로 즉위하자 동덕좌익공신이 되었다가 우승지(정3품 당상관)에 올랐다.
어느 날 성삼문과 집현전 학사들이 세조 암살의 계획을 세웠다는 정보를 입수한 한명회는 사전에 사육신을 비롯한 800여 명의 관련자들을 잡아들여 처형했으며, 수천 명을 유배 보냈다. 이 공로로 한명회는 도승지(왕의 비서실장)를 거쳐 이조판서(오늘날 안전행정부 장관)로 승진해간다.
한명회는 큰딸을 세종의 서녀(庶女) 정현옹주의 아들 윤반과 혼인하게 하고, 작은딸은 신숙주의 맏아들 신주와 혼인시켰다. 그리고 셋째 딸을 세조의 차남 해양대군에게 출가시켰는데, 그녀(장순왕후)는 아들 하나를 낳고 요절(夭折)하고 만다. 그러나 해양대군이 예종으로 즉위하면서 한명회는 다시 이조판서의 자리에 오르고, 곧 상당부원군(왕의 장인)에 책봉된다.
예종 1년에는 남이 장군, 영의정 강순의 모역사건을 ‘성공적으로’ 다룬 공으로 영의정이 됐다. 사위 예종이 죽자 한명회는 정무 전체를 맡아보는 한편, 병조판서를 겸하며 인사권을 한손에 쥐었다. 왕명출납권과 인사권, 병권 및 감찰권 등을 한손에 거머쥔 한명회는 또 다른 딸을 성종의 왕비(공혜왕후)로 만들어 2대에 걸쳐 왕가와 혼인을 맺게 된다.
넷째 사위인 성종이 즉위하면서 또다시 공신(功臣)의 칭호를 받은 한명회는 딸인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점점 힘을 잃게 된다. 그러던 중 압구정에서 명나라 사신을 사사로이 접대한 일로 관직이 삭탈된 후 73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만다. 연산군 대에 와서 폐비 윤씨 폐출사건에 책임이 있다고 12간신(奸臣)의 한사람으로 지목된 한명회는 부관참시(剖棺斬屍)됐다.
그러나 중종반정(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 이후, 신원(伸冤)되어 복관(復官)됐다. 한명회는 김종직과 그의 제자인 사림파들이 중종 이후 정치계에 본격 진출하면서 간신(奸臣)으로 격하됐다.
그러나 1990년대에 와서 그에 대한 재평가, 재조명 여론이 나타났다. 자신의 딸들까지 왕가 및 권문세족과 혼인시키며 권력을 이어가고자 했던 한명회, 과연 미래의 역사는 그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광주교대 명예교수, 철학박사, 소설가, 유튜브 ‘강성률 철학 티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