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실시된 국정감사에서 영화 '도가니'사건 책임자로 자신 지목 억울
선거앞둔 특정 교직단체와 일부 기관장들 서운함 넘어 인간적 연민 느껴
실력 광주의 산증인이자 교단선진화사업 최초 기획자인 안순일 전 광주시교육감이 지난 2015년 2월 27일 오전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1세. 안 전 교육감은 지병인 대장암이 재발하면서 지난해 12월부터 서울 아산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안 전 교육감은 광주교대부설초 등 교사 25년, 광주 용산초 교감, 광주서부교육청·광주시교육청 장학사, 광주시교육청 유아·장학담당 장학관, 광주 농성초교 교장, 광주시교육청 초등교육과장, 광주동부교육청 교육장을 두루 거쳐 교육감에 당선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안 전 교육감은 1945년 전남 보성군 보성읍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평온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글짓기’와 '웅변'에 관심이 많았다.
'동정심이 깊고 예의를 지켜 남에게 호감을 사며, 스스로 깊이 생각하고 새로운 계획으로 자진 실행한다'는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생활통지표 내용은 두고두고 그의 인생의 채찍이 됐다. 중학교 시절엔 학교 공부에 전념하며 물리학자의 꿈을 키웠다. 조대부고 시절에는 사춘기의 갈등을 겪으면서 내면적으로 성장하고, 음악이 주는 인간의 정서 함양에 눈을 뜨던 시절이었다.
특히 고인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광주교육대학 재학 당시의 문학과 음악에 대한 열정을 잊지 못했다. 문학동호인 청심회 활동과 잊을 수 없는 은사 최성호 박사가 지금도 그립다고 했다. 고인은 보성조성북교 교사로 부임해 첫 봉급 8500원이던 시절부터 합창 합주지도와 독서지도에 열정을 바쳤고 벽지학교 근무시 제자들과 맺었던 인연의 끈은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이후 광주로 전근, 근무하면서 재직하던 학교마다 학생들의 특기적성교육과 인성교육을 위한 활동으로 상도 많이 받았다. 안 전 교육감은 교장 재직 시절엔 결재석을 없애고 나란히 앉아서 담소와 결재를 병행해 조직문화에 혁신을 불러일으켰고 특히 교직생활 내내 '인성과 학력의 조화'라는 교육의 본질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 그는 이를 위해 창의적인 시책을 구안하고 실제 교육과정에 적용해 왔다. '교육의 중심에 반드시 학생이 있어야 한다'는 당연하면서도 평범한 진리를 몸소 실천했다. 이후, 지난 2006년 윤영월 당시 서부교육장을 누르고 제6대 광주시교육감에 당선됐다. '으뜸 광주교육, 실력 광주'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그는 수능1등급 비율 6년 연속 전국 1위, 4년제 대학 진학률 전국 1위 등의 성과를 일궈냈다.
학업과 함께 학생들의 체·덕·지(體·德·知) 교육에도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 초등생에게 하모니카, 중학생에게 오카리나를 무상 보급한 '1 학생 1 휴대악기 운동'은 광주 교육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 체육시간 확대로 학생들의 허약한 체력을 기르고 아름다운 학교 만들기로 품성을 기른 것도 학부모들의 호응을 얻었다. 행정면에서는 지방채 1300억원 청산과 2009년 청렴시책 평가 전국 1위, 학생중심 교육환경 개선, 학생재능 중심 U러닝 교육도시 건설 등에서 호평을 받았다.
고인은 “학생중심 으뜸 광주교육 2010 프로젝트를 완성”하기 위해 '교육의 중심에는 반드시 학생이 있어야 한다'는 교육신념을 바탕으로 ▲ 전국을 선도하는 실력광주 실현 ▲ 인성과 체력을 겸비한 전인적 글로벌 인재육성 ▲ 청렴으뜸 실현 ▲ 교육부채 제로화 달성 ▲ 학생중심 교육환경 개선 ▲ 직속기관 이설ㆍ신설 및 학교이설ㆍ재배치 등 숙원사업 완성 ▲ 학생재능 중심 U-러닝 교육도시건설 사업 추진 등을 교육감 재직시절 주요성과로 꼽은 바 있다.
고인은 주요 보직을 맡아 바쁜 일정속에서도 운암동 성당 성가대 지휘자로 10여년간 봉사하기도 했다. 교육감직에서 물러난 이듬해인 2011년 교육과학기술부 학교교육지원본부장을 역임했으며, 황조근정훈장(2007), 광주교대 자랑스런 동문상(2009), 21세기여성발전위원회 올해의 국민모범인상(2012)을 수상했다.
고인은 기자와 개인적으로 만난 자리에서 교육부 재직시절 인화학교 성폭력 사태와 관련해 지난 2011년 실시된 국정감사장에서 영화 '도가니'사건의 책임자로 자신을 지목한 특정 교직단체와 일부 기관장들에 대해 서운함을 내비쳤다. 고인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 듯 당시 사건 정황을 누구보다 잘 알던 사람들이 나를 희생양으로 몰아가는 것을 보고 배신감을 넘어 인간적인 연민까지 느꼈다"고 회고했다.
안 전 교육감은 맥주를 좋아했고 한없이 따뜻해 정도 눈물도 웃음도 많았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기까지 오로지 교육만을 생각했다. 그래서 교육에 대한 각종 기발한 아이디어가 넘쳐났다. 그렇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지역 교육계의 거인은 3월 1일 경기도 용인 천주교공원묘지에 안장됐다. 명복을 빈다.
한편, 김원본 前 광주시교육감도 지난 2007년 10일 0시 20분, 향년 72세의 아까운 나이에 별세한 바 있다.
※이 기사는 지난 2015년 3월 1일 작성된 기사입니다. 벌써 영감님의 7주기가 돌아오고 있습니다. 안 교육감님이 별세하신 후 장휘국 교육감은 기언치 3선에 성공해 마지막 임기 4개월여를 앞두고 있습니다. 안 교육감님이 살아계셨더라면 광주교대 총장들, 조선대 총장, 전남대 총장, 정치인 출신들이 너도나도 교육감선거 출마선언을 하거나 출마를 앞둔 현실을 보고 뭐라하셨을지 궁금합니다. 이렇게 광주 보통교육의 시대는 허무하게 저물어 가는 것일까요? 존경하는 교육감님, 영면을 빕니다.